호텔 신데렐라에서 주류신학교 교수까지

메릴랜드주 랜햄에 위치한 워싱턴바이블칼리지(이하 WBC)/캐피탈신학대학원(이하 CBS)의 유일한 한인 교수 서옥자 교수를 만났다. 사회심리학을 가르치는 서 교수는 CBS 출신으로 석사를 졸업한 94년부터 이 곳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고, 교수를 하면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의 일대기는 독특하다. 언론에서도 주목하던, 소위 잘나가는 20대를 지나 세계 최고의 로비스트를 꿈꾸며 미국에 왔지만 모든 길이 막히고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을 살고 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는 구절처럼 한 때 세상의 부귀 영화를 구했고 또 누렸지만, 한번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하나님은 놓치시는 법이 없다.

잘나가던 20대 “앰배서더 서”

서 교수는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판촉부장으로 일하던 중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한국에서 그녀는 ‘앰배서더 서(Ambassador Soh, 서 대사)’ 혹은 ‘하얏트호텔의 신데렐라’라고 불렸다. 외국인 손님들의 모든 행사를 총괄 기획하면서 한국 내 정치, 문화 지도자들과도 친분을 쌓았고, 각종 TV에서 ‘신(新) 여성’ 모델로 보도되면서 여성 동아에서는 10페이지 분량으로 그녀를 인터뷰해 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계 최고의 로비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그녀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뭐든지 맡기면 끝을 보는 성격

서 교수는 자신의 성격이 “극성”이라며 낮춰 말했지만, 하나를 맡겨도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라는 말이 오히려 맞을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주 토요일 교회당에 가서 밀대로 밀며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주일에는 추운 겨울에도 꼭두새벽에 일어나 교회 학생들 집을 일일이 두드려 손을 붙잡고 함께 교회에 갔다.

서 교수의 “악착같은” 성격은 학교 생활에서도 두드러졌다. 버스로 1시간 가량 가야 하는 등교길에 영어단어를 외우기 위해 늘 새벽 5시 첫 차로 등교했다. 맨 먼저 학교에 오면 겟세마네/실로암이라고 불리는 채플 개인기도실에 들어가 눈물로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 어린 나이에 뭘 안다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를 써 달라’며 기도했는지… 어린 나이에 그런 기도를 했던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기도가 지난 2007년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위해 큰 몫을 감당했던 자신의 역할을 가능케 했다고 믿는다는 서 교수. 당시 여러 한국 및 미주 언론에서 서 교수를 취재하면서 ‘로비스트’를 하면 딱 맞겠다고 북돋웠지만, 하나님은 길을 또 한번 막으셨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하나님의 꿈, 나의 꿈

화려한 젊은 날, 끝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것 같던 그녀의 삶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미국에 온 후. 로비스트가 되기 위해 왔지만 계획했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길이 막혀 버렸다.

“하나님은 제가 세상일 하는 거 원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미국행을 준비하면서 삼각산 능력봉 꼭대기에 올라 여러번 철야기도를 하던 일이 떠올랐다. 모든 일이 무산되자 울며 겨자먹기로 캐피탈신학대학원 학생 모집에 응시했지만 불합격되면 미련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학교 등록처에 일부러 2주나 늦게 왔어요. 속으로는 불합격되길 바라면서요. 그런데 저를 보더니 ‘당신은 영어를 잘하니까 토플 스코어가 없어도 되겠다’면서 합격통지를 해준 거에요. 그렇게 처음 시작됐습니다. 고등학교 때 반장을 하면 아이들이 ‘옥자. 너는 나중에 꼭 선생님 되겠다’며 놀렸는데, 저는 그 때 ‘절대 선생님 안될거다’ 다짐했었죠. 그런데 이렇게 선생님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인 학생 든든한 지원군 되다

영어를 잘한다고 자부했던 서 교수에게도 생소한 신학 영어는 어렵고 힘들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은 끝을 보는 성격의 서 교수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영어로 된 성경을 집안 곳곳에 붙여놓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외우기 시작했다.

미국 학생들이 한 과목을 위해 2시간을 공부하면 6~7시간을 공부하며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페이퍼를 쓸 때도 1주일 일찍 페이퍼를 완성한 후 교수들을 찾아가, 괜찮은지 봐달라고 도움을 구했다. 늘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은 서 교수만의 시크릿은 ‘노력’ 두 글자였다.

처음에는 미국 학생들의 노트를 보며 도움을 구했던 그녀였지만 그렇게 1년 반을 노력하니 오히려 미국 학생들이 노트를 빌려보고, 시험 공부를 같이 하자고 조를 정도가 됐다.

당시 교수로 있던 김상복 목사(한국 할렐루야교회 원로)의 도움도 컸다. 김 목사는 늘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Do your Best and Leave your result to God)”는 말을 하며 서 교수를 북돋웠다.

“공부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김 목사님 교수방으로 달려갔어요. 목회하랴 강의하랴 지친 기색이 역력할 때도 찡그림 하나 없이 웃어 주시면서 ‘미국 학생들은 몰라도 그냥 지나가는데, 이렇게 와서 질문하니 얼마나 좋으냐’며 용기를 북돋워주기도 했어요.”

이제는 그 때의 김상복 목사처럼 한인 학생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된 서옥자 교수. 그녀는 “얼마 전에는 한 한인학생이 ‘불이 켜진 교수님실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왠지 모르게 든든하다’고 말해준 탓에 괜히 사무실 비우기가 겁이 난다”고 웃는다. 70년 역사의 미국 신학교 WBC/SBC에서 서옥자 한인 교수의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워싱턴바이블칼리지(WBC)/캐피탈신학대학원(CBS)은?

교단을 초월한 초교파 신학대학으로 순수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WBC/CBS에는 약 600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으며 이 중 40명 정도가 한인 학생이다. 1938년 워싱턴 D.C.의 유대인 대상 선교단체와 성경공부 및 교육 단체, 기독사역자 양성 단체가 합병돼 생겨난 WBC/CBS는 1946년 워싱턴 지역에 캠퍼스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958년부터 석사 과정인 캐피털바이블세미너리가 함께 운영돼 왔으며, 1969년 메릴랜드 랜햄 캠퍼스로 이전했다. 맥클린바이블처치 론 솔로몬 담임목사도 CBS 출신이며, 이 외에도 많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전세계로, 또 지역 복음전파자로 배출하고 있다.

서옥자 교수 연락처) Osoh@bible.edu

권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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