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심리학 키운 분트의 방…130여년전 역사와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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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심리학 키운 분트의 방…130여년전 역사와 조우했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③ 근대심리학 창시자 낳은 라이프치히


심리학사의 장면 1 : “그는 심리학을 철학으로부터 독립된 과학으로 제도화시켰다.”

심리학사의 장면 2 : “그는 심리학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누구든 이 두 장면을 보면 서로 적대적인 두 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한 학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독일 학자 빌헬름 분트(1832~1920)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에는 분트의 발자취를 찾아서 라이프치히로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이 카셀에서 라이프치히로 가면서 차창 밖으로 내다본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대지는 며칠 전부터 내린 눈으로 덮여 있었고, 그 설국에 평지와 숲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흐르는 개울은 청량감이 넘쳤다. 간간이 보이는 마을과 인가의 굴뚝에서는 한가로이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나라 시인 유종원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산이란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마다 사람 자취 끊겼네/ 외로운 배 위에 삿갓 쓴 늙은이/ 혼자서 낚시질, 추운 강에는 눈만 내리고.”

심리학은 실험의 방법 통해서만
과학적 객관성을 얻는다는 믿음
세계 첫 실험심리학 연구소 개설
학문적 업적이룬 제자 여럿 길러

연구소 있었던 건물은 사라졌지만
라이프치히 대학에 ‘분트 방’ 있어
지팡이와 책상·수강생 자료 보관

“철학없는 심리학자는 수공업자다”
그의 뼈있는 말이 귓전에 맴돌아


그러나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도착하면서 이런 상념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역 건물은 마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처럼 거대했다. 그 역을 빠져나와 첫눈에 들어온 라이프치히는 장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가 53만명 남짓이어서 독일에서 열한번째로 큰 도시이며, 오랫동안 중동부 독일 작센 지방의 경제·상업·교육·문화·행정·교통의 중심지 구실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프치히를 “작센의 은밀한 수도”라고도 한다.

대학은 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라이프치히대학은 1409년 독일에서 다섯번째로 문을 연 대학이다. 오래된 대학들이 고유명사를 갖고 있는 데 반해 이 대학은 고유명사가 없다. 옛 동독 시절에 ‘카를 마르크스 대학’이라고 불리다가 통일 뒤에는 ‘라이프치히대학’으로 바뀌었다.

라이프치히대학은 19세기 중엽부터 급속하게 발전하여 1875년에는 독일에서 가장 큰 대학이 되었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약 10만명이었고 학생 수는 약 3000명이었다. 세기의 전환기에는 저명한 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는데, 그중에는 기념비적인 연구업적을 낸 학자들도 여럿 있었다. 분트는 그런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취리히 대학의 교수를 거쳐 1875년부터 이 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889~1890년에는 총장을 지냈다.

본디 심리학은 철학의 일부분으로서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사변적인 형이상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이르러 점차 현실적 경험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경험과학으로 발전했다. 이런 변화는 합리화되고 분화된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에서 어떻게 개인들의 주관적인 삶과 행위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의 결과였다. 그것은 시민계층의 자아성찰이었다.

뒤이어 심리학은 생리학과 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엄밀한 연구방법을 쌓아 나간다. 특히 에른스트 하인리히 베버(1795~1878)는 1830년대부터 인간의 촉각을 실험적 방법에 따라 측정하기 시작했다. 구스타프 테오도어 페히너(1801~1887)는 1860년대 베버의 실험심리학적 사고에 입각해 정신물리학을 구축했다. 정신물리학은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 곧 외적 자극과 내적 감각의 관계를 실험적 방법을 통해 엄밀하게 측정하고 그 결과를 수학적 언어를 통해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베버와 페히너는 라이프치히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러니까 (이 두 학자가 교수로 재직하며 끼친 영향으로) 이 대학은 그 어느 대학보다도 실험심리학의 정신이 강했던 것이다. 실제로 분트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베버와 정신물리학의 아버지 페히너를 알게 된 것을 더없는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밖에도 분트는 라이프치히에서 여러 분야의 내로라 하는 학자들과 교유하고 토론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09년에 노벨상을 받은 화학자 빌헬름 오스트발트(1853~1932)였다.

분트는 라이프치히대학에 교수로 초빙된 지 4년 만인 1879년 세계 최초로 실험심리학 연구소를 개설했다. 이는 심리학이 실험의 방법을 통해서만 과학적 객관성과 엄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구현한 것이었다. 더불어 심리학이 하나의 독립적인 분과과학으로 제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분트의 연구소는 보잘것없었다. 그것은 겨우 실험실 한 개밖에 없는 일종의 사설 연구소였다. 그러다가 1882년부터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1883년에는 라이프치히대학의 실험심리학 연구소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때에는 실험실이 일곱 개로 늘었다. 이로써 분트와 그의 연구소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당시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심리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라이프치히로 몰려들었다.

분트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이들에 의해서 심리학은 다양한 방향과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분트가 이곳에서 남긴 또 한 가지 커다란 업적은 라는 저널을 창간했다는 사실이다. 이 최초의 심리학 저널은 1883년에 창간되어 1902년까지 존속했다. 그리고 1906년부터 1917년까지 그 성격에 걸맞게 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되었다. 이 두 저널은 실험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널리 보급했다.

분트는 거의 30년 동안 대학 근처에 있는 ‘괴테슈트라세’ 6번지에 살았는데, 아쉽게도 그 자리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또한 분트의 실험심리학 연구소가 있었던 건물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그 옛 터전이나 둘러보려고 대학 안으로 들어서니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의 기념상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이곳에서 공부했다. 그 밖에도 괴테·니체 등의 거장들, 현재의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수학했다.

분트의 발자취를 제대로 더듬어 보려면 아무래도 심리학자들에게 묻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심리학과를 찾았다. 그랬더니 심리학과에는 ‘분트 방’이라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먼 길을 온 사유를 말하자 학과 사무실 직원은 따뜻한 커피를 대접했다. 박사후 과정의 한 여성 심리학자는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는 심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가 분트에 관심을 품고 라이프치히를 찾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채 한 시간이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심리학과 사회학의 학제간 대화를 나누었다. 이것만으로도 추운 겨울날에 라이프치히를 찾아와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분트 방에서 만난 유물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라이프치히대학에서 한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의 명단이었다. 그 학생들은 후일 나름대로 심리학의 역사를 장식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인들까지 분트에게 찾아가 직접 배웠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자료도 있었다. 이처럼 분트의 실험심리학 연구소는 그 시작이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했다. 그곳 실험기구가 예상했던 것보다 다양하고 정교한 사실에도 놀랐다. 분트는 실험심리학의 연구 분야를 감각의 측정, 자극-반응 측정, 시간표상 측정, 재인식과 기억력 측정 등 일곱 분야로 세분화하고 그에 적합한 실험기구를 제작해 사용했다. 그것들은 1/1000초까지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분트가 사용하던 지팡이도 있었는데, 키 170㎝의 그리 크지 않은 그 ‘지적 거인’은 글을 쓰다 지치면 이 지팡이를 짚고 산책을 했다고 전해진다.

라이프치히는 장중하지만 아주 고풍스러운 도시다. 따라서 볼거리도 많다. 그중에서도 토마스 교회는 1212~1222년에 지어진 후기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1212년 이 교회에서 조직된 ‘토마너 성가대’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소년 합창단 중 하나이며, 특히 바흐가 1723년부터 175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휘자로 이 합창단을 이끌어 유명해졌다. 또 니콜라이 교회는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큰 교회인데, 1165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5~16세기에 후기 고딕 양식으로 증축되었다. 바로 대학 옆에 있다. 그리고 1813년 10월16~19일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기념하는 ‘제(諸) 국민 전투 기념비’는 91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로서 이 도시의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 밖에 1848년 문을 연 조형예술 박물관은 중세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도시 마천루’였다. 총 29층에, 높이 142m(안테나까지 합치면 155m)의 이 건물은 옛 동독 시절인 1968~1972년에 지어졌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본디 ‘카를 마르크스 대학’의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 본관 건물 바로 옆에 있다. 현재는 한 미국 투자은행의 소유이며 ‘중부독일방송’ 등이 세 들어 있다.

사실 이 건물은 유서 깊은 도시와 대학에 왠지 안 어울려 보인다. 아니, 마치 이물질처럼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이 건물을 동독의 잔재라고 없애 버리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단과 사회주의도 엄연히 독일 역사의 일부분이다. 저 현대식 건물은 독일과 라이프치히의 한 역사적 단면을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통이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라이프치히의 명물이 될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이 그러지 않았는가! 우리처럼 모든 것을 때려부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라이프치히에서 분트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내내 오늘날의 심리학과 인문사회과학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심리학과 철학에 대한 분트의 태도 때문이었다. 분트는 심리학을 철학의 일부분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리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철학과를 세 분야로 나누어서 각각 철학이론·철학사·심리학에 할당할 것을 제안했다. 분트 자신도 심리학 교수가 아니라 철학 교수였다.

이러한 태도는 다양한 과학과 인식이 분화되고 제도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의 자아성찰에 대한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분트는 심리학의 ‘과잉 분트화’를 염려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심리학이 인간을 실험의 대상으로만 보게 되는 것을, 그리하여 인간의 자연과학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을 염려했던 것은 아닐까?

분트는 주장했다. 철학이 없는 심리학자는 수공업자에 불과하다고! 벌써 100년이나 된 이 주장이 새롭게 와 닿는 것은 오늘날 심리학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이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망각하고 갈수록 계량화되고 통계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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