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깐깐한 마 부장도, 소심한 무 대리도 심리학으로 속 풀다

심리학 강좌를 듣고 있는 SK텔레콤 임직원들. 같은 내용을 들으면서도 표정은 다르다. [사진 SK텔레콤]
지난달 20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삼화빌딩 3층의 한 강의실. SK텔레콤 직원 50여 명을 대상으로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박수애 교수가 ‘설득의 기술’을 주제로 한창 강의를 하고 있었다. 강의는 박 교수가 질문을 던지면 수강생들이 응답하는 식으로 이어졌다. 박 교수는 화면 중앙의 사람 얼굴을 가리키며 “화면 속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 말해달라”고 질문을 던졌다.

 “웃는다” “덤덤하다” 등의 대답이 이어졌다. 수강생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박 교수는 “사람은 리더가 될수록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해지는 경향을 보인다”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SK텔레콤 직원들은 틈틈이 필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는 90여 분간 이어졌지만 조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강의가 끝난 뒤 이 회사 신구열 매니저는 “회사 내외에서 만나는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곤란을 겪은 경험이 있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상대방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됐다”며 “강의를 통해 마음속 고민도 털고, 상대방의 마음도 헤아리고 싶어서 수강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심리학이 직장인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고경영자(CEO)들이 문학과 철학에서 장기적인 사업 방향을 찾는 것과 달리 당장 하루하루의 업무처리에도 바쁜 직장인들은 심리학 관련 과목을 들으며 마음을 달래거나 스트레스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타인의 행동 패턴을 더 효과적으로 이해해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거나 업무를 매끄럽게 진행시키려는 목적에서도 심리학에 대한 주목은 더 커지고 있다. 심리학이 인기를 끌면서 주요 기업들은 사내 교육과정에 이를 넣거나 임직원들의 심리학 수강 편의를 돕기 위해 회사 인근에 별도의 강의실을 마련하기도 한다.

 사내 심리학 강의를 공격적으로 도입한 회사는 SK그룹이 대표적이다. 그룹 내 주력 계열사인 SK텔레콤은 올 들어 심리학을 비롯한 사내 교육 강좌(T클래스)를 들은 누적 수강자 수가 5511명에 달한다. 월평균 689명이다.

  이 회사 역량개발팀 장경형 매니저는 “심리학이란 학문 자체보다는 현장에서 활용되는 ‘사람 간 관계’나 ‘상대방 설득 노하우’ 등에 관한 문의가 늘어나는 것도 특징”이라고 말했다. 심리학 수강을 원하는 이가 늘면서 SK텔레콤은 부서장급 이상을 위한 별도 강의도 개설할 계획이다. 이 회사는 온라인 강의뿐 아니라 을지로 본사 인근을 찾아가는 강의도 한다. ‘사내 교육=온라인’이라는 등식을 깨기 위한 시도다. 심리학의 경우 특히 대인관계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회사 김홍묵 미래경영연구원장은 “심리학 등 인문학 강의도 실제 업무 상황에서 활용 가능한 주제를 적용할 수 있도록 구성하여 현장강의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른 대기업들도 최근 사내 교육과정에 심리학 관련 과목을 공격적으로 넣고 있다. 삼성전자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나 리더십 등 심리학 관련 강의를 10여 종 운영 중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다른 사내 교육은 대부분 업무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심리학 관련 강좌들은 업무역량 못지않게 직원 상호 간의 마음과 스트레스를 헤아리는 측면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포스코는 자체 e-러닝(e-Learning) 과정 속에 ‘마음을 다스리는 힘’ ‘마음을 움직이는 배려’ ‘까다로운 인간관계 관리’ ‘성공하는 인생을 위한 조언’ 같은 심리학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2007년 개설된 ‘마음을 다스리는 힘’ 강좌의 경우 8월 말 현재까지 1만2000여 명이, ‘마음을 움직이는 배려’는 1만8000여 명이 수강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심리학 관련 강좌의 경우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이 아님에도 최근 수강생이 다른 강좌보다 두 배가량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며 “앞으로 더 다양한 심리학 관련 강의를 온·오프라인을 통해 제공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현대자동차도 ‘미니심리학’ 강좌를 갖추고 사원들이 수강토록 하고 있다. 특히 두뇌의 정보처리 과정을 중심으로 타인의 사고과정을 이해하도록 돕는 ‘인지심리’나 사회적 규범이나 타인의 의견에 따라 개인의 행동이 결정되는 ‘동조심리’ 과목은 다른 회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과목들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임직원 요청으로 심리학 관련 과목이 개설되기도 한다. 현대백화점에서 진행된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힐링캠프’라는 심리학 관련 강의가 대표적이다. 이 강의는 임직원이 직접 제안하고 투표로 성사 여부를 결정하는 ‘옥션(경매)형 과목’ 중 요청 건수 1위를 차지했다. 옥션형 강의에는 이 과목을 비롯해 총 131개가 경합했다. 지난 7월 이뤄진 강의에서는 주로 몸과 마음속 스트레스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유통업체 못지않게 외부 고객사를 자주 접하는 IT서비스 기업에서도 심리학 관련 과목은 인기다. LG CNS는 임직원들의 ‘사람 이해를 통한 업무성과 향상’을 목적으로 ‘사람을 알면 쉬워지는 커뮤니케이션’이란 교과목을 운영 중이다. 여기에선 사람의 여러 유형별 특징을 구분하고, 상황별 효과적인 의사소통법을 배운다.

 LG CNS 김종욱 과장은 “첫 강좌가 열린 2006년에 비해 정원이 두 배 이상 늘어났고, 1년에 3회였던 강좌 수도 올해 8회로 늘어날 만큼 직원들의 관심이 뜨겁다”고 설명했다.

 한편 직장인이 사회관계나 인간관계에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의문점을 심리학을 통해 풀어내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인간관계나 심리학 관련 서적의 판매량도 늘고 있다. 3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40.5%를 기록했던 인간관계 관련 분야의 책들은 올 들어 7월까지 판매량이 26.3%가량 늘었다.

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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