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k독서캠페인우수작]긍정이라는 기만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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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가 말의 의미는 단일하고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해 언어의 다양한 사용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예컨대 ‘자유’의 경우, 일견 좋은 의미로만 보이지만 사실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갈급한 ‘자유’와 수천만 달러 재산을 가진 거부들이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아 내세우는 ‘자유’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를 얼마든지 기만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수입되어 한국에서 열풍을 불어온 소위 ‘긍정의 힘’ 역시 이런 기만의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긍정’이라는 말의 기만적 사용은 우리 사회에서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상사나 선배의 불합리한 요구에 순순히 따르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으로 평가되고, 어떻게든 그런 요구를 거부하고 벗어나려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으로 ‘불만 세력’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부당함을 외면한 채 ‘긍정적인 사고’로 삶을 산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이뤄낸 ‘성공적인 삶’을 산 인물로 평가 받는다. 이런 ‘긍정적인 사고’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라고 가르친다. 그 욕망이 어떠한 욕망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대의이건 타인의 권리이건 어떠한 것들도 ‘부정’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긍정의 힘’은 현실의 문제점을 은폐하는 도구가 됐으며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돼버렸다. 그리고 변혁을 요구하는 욕망을 억압하는 하나의 효과적 수사가 됐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자신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황당한 생각. 인간을 마치 하나의 신처럼 여기는 우스꽝스러운 우상화는 역으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매개가 된 것이다.

이처럼 ‘긍정’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다. 특히 ‘긍정’해야 할 대상에 따라서 그 의미는 극단적으로 변하게 된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오직 대의만을 긍정했으며 그 대의를 저버리는 어떤 것들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현대 싸구려 긍정주의자들과 위대한 혁명가들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조엘 오스틴은 자신의 사상이 기독교적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조엘 오스틴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면 복과 명예가 따라온다고 가르친다. 이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의 강론과는 전혀 다르다. 또한 조엘 오스틴과 함께 한국의 긍정 심리학 열풍을 주도한 의 저자 론다 번은 그의 책에서 자신의 사상이 플라톤과 같은 고대 저자로부터 전해지는 ‘시크릿’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플라톤이야말로 ‘긍정 심리학’과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인물이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참된 이데아 세계의 모사로서 불완전하며 지양돼야 할 세계라고 생각한 인물이다. 이처럼 긍정 심리학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전통 어디에서도 지지할 수 없는 궤변적이며 기만적 사상인 것이다.

세계는 이미 변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욕망의 무제한적 자유가 있다고 믿었던 미국 주도의 거대 자본주의도 이미 비틀거리고 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믿던 순진한 중산층 사람들도 이제는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의 ‘99퍼센트’ 시위는 그 상징적 모습일 것이다. 이제 우리도 긍정이라는 기만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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