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동물, 개미의 눈으로 다시 봤더니


사회생물학의 승리
존 올콕 지음, 김산하·최재천 옮김
동아시아, 383쪽, 1만6000원

그 누구도 한 점의 사심도 없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관찰 대상이 외부가 아닌 우리 자신일 때는 더욱 더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고자 가끔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곤 한다. 그것은 다른 존재의 ‘눈’을 살짝 빌리는 것인데, 그 목록에는 유전자를 비롯해 세균·개미·침팬지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식이다. 만일 세균이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의 특성을 ‘관찰’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생명의 역사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을까. 물론 세균을 위해 이런 식의 급진적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은 특별한 존재니까 남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가설을 기각하기 위한 성찰이다.

 하버드대 개미 연구자 에드워드 윌슨이 『사회생물학』(1975)을 출간했을 때 수많은 독자들을 화나게 한 것은 바로 그의 탁월한 역지사지 능력 때문이었다. 평생 동안 개미의 사회 행동을 연구해온 그에게 동일한 관점에서 다른 동물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책 분량의 단 5%도 안 되는 마지막 장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개미에게 적용한 관찰과 분석법을 그대로 인간에게도 적용함으로써 우리를 자연계의 특례자에서 제외시켰다. 그 어떤 생명체도 진화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선언이었다. 게다가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머지않아 생물학의 한 분과가 될 것”이라는 도발적 언사는 지난 40년 동안 학자들을 사회생물학의 찬성 진영과 반대 진영으로 양분하는 계기가 됐다.

 동물행동학 분야의 필독 교과서를 쓴 저자 존 올콕이 이 전쟁의 최종 심판자를 자처하며 한 권의 책을 썼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런데 얼마나 한이 맺혔던지 제목이 아예 『사회생물학의 승리』(원제 The Triumph of Sociobiology)다. 그에 따르면 사회생물학은 “자연선택이 동물의 사회 또는 사회성 행동의 진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탐구이다.

 그렇다면 벌의 사회성 행동을 연구했던 다윈이나 개미의 사회를 연구한 윌슨, 그리고 동물의 행동을 진화론적으로 탐구하는 연구자들은 모두 사회생물학자다. 여기서도 쟁점은 인간도 그 동물의 범주에 포함시킬 것인가 여부다. 다른 동물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연구가 아무리 탄탄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사회생물학의 승리가 자동으로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어떤 독자들은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진화심리학 책들은 인간의 본성을 다루다가 동물의 행동 양태를 양념처럼 언급하는데 비해, 이 책의 저자는 동물행동학 대가답게 진화 논리를 동물에게 충분히 적용해본 후에 인간에게로 확장하는 방법을 취한다.

 예컨대 곤충의 짝짓기 행동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소개한 후 진화심리학 분야에서 수행된 인간 짝짓기에 관한 연구를 병치시킴으로써 모든 생명체가 진화의 씨줄과 날줄로 함께 엮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수컷 곤충의 강압적 성 행동과 인간 남성의 강간 행위를 비교하는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상당히 불편해진다. 가령, 딱정벌레 수컷은 암컷의 격렬한 저항에도 사정에 성공, 자신의 번식률을 높이기도 하고, 남성은 여성과 짝을 맺을 가능성이 적거나 없을 때에 강간을 통해 자신의 번식 성공도를 높일 수 있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한 강간이 남성의 진화된 강력한 성욕의 부산물일 수 있다는 가설도 검토한다)

 이런 불편함은 아동학대에 대한 대목에서 증폭된다. 왜냐하면 “아동이 의붓부모에 의해 살해될 개연성이 친부모에 의한 경우보다 70배나 높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 혈연 선택 이론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유전적 근연 관계가 없는 의붓자식에게 투자를 하는 부모는 번식 성공도가 쉽게 낮아지기 때문에 의붓부모의 아동 학대 비율은 현저히 높을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페미니스트와 의붓부모들이 들고 일어날 지경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저자는 오히려 돌직구를 던진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진 않을지언정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그러면서 ‘자연적인 것’ 또는 ‘진화된 것’과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되며, 사회생물학자들이 그것을 혼동하는 이들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렇다 치자. 대체 이런 논쟁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사회생물학은 대개 동물과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소비된다. 이에 더해 어떤 행동에 대한 변명이 필요하게 되면 그것은 더 유용해진다. 즉, 재미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것 같으니까 소비되고 확산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얄팍한 쓰임새가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사회생물학 담론을 쏟아낸 근본 동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 동인은 우리 종에 대한 특례자 대우에서 벗어나 마치 개미가 인간을 ‘관찰’하듯 제 3자의 입장에서 사심 없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성사에서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결국 진화의 산물’이라는 다윈적 자각에서 비롯된 점증하는 열망이다. 사회생물학은 이 근거 있는 열망의 적자인 셈이다. 아직 나는 저자처럼 사회생물학의 손을 번쩍 들어주고 싶진 않다. 하지만 반대자들의 주장처럼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 현대 진화론 논쟁을 다룬 『다윈의 식탁』을 썼으며 진화학과 생물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 장대익 교수가 권하는 더 읽을 책들

진화론·사회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생태계 전반에서 차지하는 인간이라는 종(種)을 객관적으로 살펴본다. 특히 2009년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150주년을 맞으며 출판가에도 관련서가 쏟아졌다.

 그 중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2012)은 이 분야의 기본 텍스트로 꼽을 만하다. 인간의 본성을 진화된 심리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짝짓기·양육·협동·폭력 등에 대한 최신의 경험적 연구를 집약했다. 깊이와 정보, 그 어느 쪽에서나 만족스럽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이해됐을까. 『사회생물학 대논쟁』(이음·2011)은 이에 대답하는 책이다. 최근 국내 학계에서 벌어진 사회생물학 논쟁을 엮었다. 일반인이 읽기에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그만큼 논의가 전문적이다.

 『밈: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바다출판사·2010)도 흥미롭다. 유전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아이가 엄마를 따라 하는 것 같은 비유전적 요소인 문화전달자(밈·meme)를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제시한다. 생존과 경쟁이 주요 원리인 사회생물학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이타성과 종교성 등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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