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오패스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유

[토요판]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악행을 저질러도 죄의식이 전혀 없고, 관계에 대한 어떤 애착도 없으며,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 냉혈한들. 심리학에서는 이들을 반사회적 성격장애 혹은 소시오패스(sociopath)라 부른다. 전체인구의 4% 정도가 소시오패스라는 연구도 있다. 타인에 대한 존중, 관계에 대한 애착 등 우리에게 소중한 모든 가치들이 소시오패스에게는 ‘쓸모없는 감정노동’이 되어버린다. ‘heartless’(비정한)라는 단어는 소시오패스의 캐릭터를 정확하게 묘사한다. 심장이 없는 것처럼, 마음 자체가 없는 것처럼, 그들은 타인을 향한 어떤 공감이나 연민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거나 타인을 원격조종하는 데 도가 터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쉽게 매혹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에야 자신이 철저히 유린당했음을 깨닫는다. 피해자는 속출하는데 가해자는 찾을 수 없는 상태를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은, 카멜레온 못지않은 보호색을 띠고 있어 어떤 법망에도 걸리지 않은 채 내딛는 발걸음 하나마다 타인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소시오패스의 결정적인 폐해는 ‘결국 악당들이 최후의 승자’라는 식의 거짓 편견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소시오패스는 부도덕한 정치가나 사업가, 사기꾼의 형태로도 나타나지만, 자식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부모, 소름 끼치는 데이트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친구, 힘없는 친구를 왕따시키고 상습구타하는 학생, 아무도 모르게 부지런히 악플을 남기는 끈질긴 안티팬일 수도 있다. 그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것은 불의를 보고도 두려움 때문에 슬쩍 눈감는 사람들의 ‘겁먹은 표정’이다. 소시오패스에게 자유를 빼앗겨 자신을 비하하는 순간, 그들의 겁박에 못 이겨 세상을 비관하는 순간, 자신이 당한 끔찍한 폭력조차 ‘내 탓’으로 돌려버리는 순간. 그들의 가짜 권력은 진짜 권력으로 뒤바뀐다. 소시오패스는 ‘공포의 권력’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소시오패스의 승리는 바로 타인으로 하여금 삶의 의지, 인간에 대한 신뢰조차 꺾어버리는 데 있다.

정말 그들은 승리할까? ‘착하게 살아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체념이 맞는 걸까. 양심도 죄책감도 책임감도 던져버린 삶 vs 양심과 애착과 관계를 추구하는 삶 사이에 선택지가 있다면,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심리학자 마사 스타우트의 에 따르면, 양심이란 초자아(superego)의 감시와는 다르다. 초자아는 두려움을 무기로 주체에게 명령하는 내면의 권력이다. 이러면 부모님이 싫어할 거야, 남들이 비난할 거야, 하는 ‘상상된 타인의 시선’이 초자아를 구성한다. 양심은 좀더 따스한 내면의 권력이다.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느끼는 애착, 소중하다 믿는 가치관 때문에 느끼는 책임감이 양심을 구성한다. 소시오패스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유도 관계에 대한 애착, 삶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소시오패스는 특유의 어두운 카리스마나 화려한 성공 때문에 승자로 보이지만, 사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애착’과 ‘관계성’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불행한 인간이다. 그들은 지켜야 할 자기상(self-image)이 없기에 내면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는 느낌을 알지 못한다. 예컨대 그들은 윤동주의 같은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살아남은 것 자체가 부끄러운 순간을.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며,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을 바라보는 쓸쓸함을.

스콧 피츠제럴드는 소시오패스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지배력을 ‘열등한 자들의 폭정’이라 했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 때문에 삶을, 사랑을, 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개인 차원에서는 소시오패스가 일시적으로 유리할 수 있지만, 집단 차원에선 서로 돕고 배려하는 이타적 유전자가 훨씬 효과적으로 살아남는다. 포식자를 발견한 톰슨가젤이 껑충 뛰어오르면, 자신의 생존가능성은 낮아지지만 무리가 달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지듯이. 이러한 ‘이타적 행동’은 동물이 종을 보존시키는 지혜였고, 인간이 삶을 단지 경쟁과 지배게임에 종속시키지 않는 비결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언처럼, “벌떼에게 좋지 않은 것은 벌에게도 좋지 않다.” 무인도에 소시오패스만 모아놓는다면, 저마다 자기만 생각하는 그들은 얼마 못가 멸종할 것이다. 소시오패스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유를 예수님께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시지 않을까. “온 세상을 얻고도 제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소시오패스는 권력과 싸워 이기는 양심의 소중함을, 부귀영화의 달콤함을 넘어서는 관계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양심은 야단치는 말투, 호통치는 목소리, 감시하는 눈초리가 아니라, 나직하고 고요한 목소리로 우리의 내면을 간질이는 봄날의 햇살 같은 것이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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