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의 심리학, 마운드 위의 ‘독특한 쇄신책’

지난 24일 광주 KIA-SK전. 9회말 1사 만루에서 KIA 이용규가 때린 타구를 SK 유격수 최윤석이 서두르다 놓쳤다. 끝내기 실책. KIA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총알같이 뛰어나와 기쁨을 만끽했다. 무리의 선두에는 외국인 선수 앤서니가 있었다. 이날 선발로 나서 7이닝 5피안타 1실점으로 호투했던 그는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지만 승리를 신나게 즐겼다. 등판 전 그는 머리를 하얗게 밀고 나왔다.

외국인 선수는 물론 이적생도 '삭발 행렬'에 동참했다. 22일 삼성에서 KIA로 트레이드된 조영훈은 23일 머리카락을 밀고 나왔다. KIA는 22일 베테랑 김상훈의 주도로 최희섭·이범호·서재응·나지완·김선빈 등 대부분 선수들이 삭발을 했다. 전날 삼성전 역전패(2-7) 후 선수단 미팅에서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머리라도 밀어서 의지를 보여주자"고 결의했기 때문이다. 선동열 KIA 감독은 "선수들이 한 번 해보자는 분위기를 만든 건 좋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KIA는 삭발 후 주말 3연전에서 2승1패를 기록하며 이달 들어 첫 위닝시리즈를 기록했다.

7위 KIA에 앞서 최하위 한화도 '삭발 릴레이'를 펼쳤다. 지난 19일 주장 한상훈이 머리를 밀고 나오자 김태균·최진행·신경현 등도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바로 전 주에 1승5패를 당하자 한대화 한화 감독도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왔다. 한 감독은 "(성적이 좋지 않아) 초라해 보일까봐"라고 말했다. 한화는 지난주 4승2패로 선전했다. 성적이 좋아지자 한 감독은 "우리 팀에 스님들이 넘쳐난다. 절 같다"며 웃었다.

이달 초에는 삼성에 삭발 열풍이 몰아쳤다. 최고참 진갑용이 머리를 짧게 깎자 이승엽이 뒤를 이었다. 이승엽은 2일 대구 두산전에 앞서 라커룸에서 전기이발기로 머리칼을 밀었다. 타격부진에 대한 자책이었지만 이 장면을 지켜본 삼성 후배들도 큰 자극을 받았다. 이승엽은 "삼진을 자주 먹는 등 내 자신을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는 삭발 후 3경기에서 홈런 2개를 쳤고, 6위였던 삼성 순위는 꾸준히 올라 3위로 점프했다.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 프로야구에서 느끼는 문화 충격 중 하나가 삭발이다. 앤서니의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다. 대부분의 외국인 선수들은 "머리칼을 자르는 것과 야구 잘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특히 올 시즌처럼 너도나도 삭발 행렬에 동참하는 건 외국인들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팀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처방전이 몇 가지 있다. 채찍과 당근 그리고 삭발이다. 코칭스태프가 미팅을 열어 '채찍'을 들거나, 구단은 보너스 지급 등의 '당근'을 내놓는다. 과학적으로 실효가 가장 없는 게 삭발이다.

삭발은 한국식 군대문화가 낳은 독특한 현상이다.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멋과 체면을 버린 채 하나의 목표를 향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증명된 효과는 전혀 없지만 삭발은 꽤 효과적인 쇄신책으로 통한다. 감독이나 구단이 아닌 선수가 주체가 돼 결집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중 한화에 1승2패를 당한 LG의 한 선수는 "우리와 경기를 앞두고 한화 선수들이 삭발을 해서 신경이 쓰였다. 우리도 해야 할 것 같았다"면서 "김기태 감독님이 수석코치였던 지난해 삭발하셨던 게 생각난다"고 말했다. 삭발한 상대와 싸우는 것도 적잖은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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