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이념 또는 이론이 인간을 규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론으로 무장한 인간은 과연 인간사회 안에서 하나의 본보기가 되거나 지도자로서 역할할 수 있을까? 이론의 추구는 현상에 따른 반응으로 길을 찾아가거나 방향을 고민하던 인간 역사에 대하여, 반대의 방식으로 하나의 틀을 세운 뒤에 그 틀에 맞추어 현상을 만들어내려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현상에의 반응은 그 결과가 너무도 불투명하여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주기도 했지만, 근대 인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지 못한 면만이 부각되어 왔기에 이론을 고민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론에의 추구가 결과는 만들어내지는 못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긍정적이었던가.. 사실 이도 그렇지는 않았던 듯 하다. 자본론을 바탕으로 한 맑시즘은 대공황 이후의 전세계 노동자 대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출현을 예언했지만, 노동자들은 자국 안의 정치적 움직임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식민지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에도 외면한 나머지, 공황에의 극복을 대투쟁을 통하기는 커녕 세계대전이라는 자본의 방식안에서 모든 것을 굴복하고 말았다. 또한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히틀러의 광기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유대인들과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학살을 불러 일으켰다. 공산주의 이론 역시 현실 공산주의는 냉전이라는 체제경쟁과 내부의 계급갈등 그리고 변형된 독재형태로서 의도가 변질되며 결국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추구했던 이론이 원래부터 결점과 오류를 지니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와 이를 바탕으로 한 권력이 너무 유혹적이고 강력해서 그러했던 것일까? 답을 내기는 어렵다. 기대가 가능한 지는 모르겠으나, 완벽한 이론은 없더라도 완벽에 가까우며 현실성 있는 이론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군파라는 조직은 19세기 중반의 생디칼리즘 또는 아나키즘 적인 노동자 투쟁을 닮은 면이 있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에 인민을 설득시킨다는 전술을 사용했던 무리들은 알다시피 또는 당연히 실패했다. 이는 인민에 대해 사후설득이라는 이론적 오류를 지니고 있었던 탓인지 모른다. 폭력을 통해 전세계 동시혁명을 이루고 그 선봉에 자신들이 서야 한다는 적군파의 이론적 오류는 어쩌면 자명하기에 조직안에서의 참극을 불러일으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론의 심화와 공고화를 위해 동료의 죽음을 초래하고 그것을 패배사라는 말까지 지어내며 합리화하는 과정은 지도자의 이론적 리더쉽을 넘어서는 어떤 공포스러움이다. 동시에 조직원 개개인이 이론을 위해 자신의 이성과 사고를 철저하게 개조해내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합리적 방향성을 상실한 채 스스로가 파국의 길로 접어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은, 조직심리 또는 사회심리는 과연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아이히만처럼 무념의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는 작업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이론을 통해 몸과 마음이 무장되기를 요구당하고 스스로도 바라고 있던 상태였다. 스스로 죽여지기를 바라고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마음의 혼란속에서 몸이 움직이고 나중에는 그것을 어떠한 형태로 합리화시킨 이론이 제시되면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그 심리는 독자의 입장에서나 바라보는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기는 하나 한가지 의문은 떠오른다. 내가 저들 안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저 심리상태에서 박차고 나와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일본의 적군파나 독일의 적군파를 사상적 투쟁으로만 보기엔 좀 더 깊은 지점에 대한 아쉬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극좌파적 의미에서는 국가주의와 부르주아에의 대항이라는 신념을 존중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보여준 결론은 이론을 우선적으로 추구한 조직이 보여준 심리학적 기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창때를 낭비하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시작해서 인민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전술로서 이론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재증명했다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사회에서 좌파의 투쟁과 학생운동이 완벽한 무관심과 허약함으로 빠져들었음을 생각하면 적군파의 비극적 결과는 사상적 동일진영 안에서도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암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 최근에 벌어진 이석기를 중심으로 한 사태는, 물론 정권차원에서의 교활한 정치적 활용수단으로서 철저하게 이용당함으로 마무리되었고, 자체적인 역량도 무척 허약하기는 했지만, 진보진영 안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사안이었고 집단이었음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