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나는 속이 아주 깊다. 그런데 내 속이 깊은 줄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좁아서 그렇다. 속이 한없이 깊지만 동시에 아주 좁은 나는 대인관계에 항상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인생이 자주 꼬인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잘 버틴 건 또 다른 능력이 있어서다. 결정을 잘해서다. 쫀쫀하고 비겁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과감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선택과 결정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한 사회도 시기마다 결정의 문제에 당면한다. 시대의 변화를 설명하고 해석해야 하는 지식인사회도 마찬가지다. 빌헬름 분트로 시작된 근대 심리학이 독일의 대표 학문이 되지 못하고, 미국에서 꽃을 피운 이유도 결국 시대적 결정의 결과였다.
당시 독일 학자들은 ‘근대적 개인’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당시 독일 지식인사회에는 개인의 내면에 일어나는 정신적 과정을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틀보다는 기존 철학이나 사회학으로 충분히 규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심지어는 실험심리학의 창시자인 분트조차 자신이 속한 라이프치히대에 심리학과가 신설되는 걸 반대했다. 철학이면 충분한데 구태여 심리학이 필요하겠느냐는 생각이었던 거다.
독일·프랑스 지식인사회의 철학적 깊이와 권위에 눌린 미국이라는 ‘후진국’ 유학생들에겐 신설 학문인 심리학이 훨씬 편안했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유럽 대륙의 개념적 사고를 쫓아가기보다는 실험을 통해 확인된 팩트와 숫자를 논하는 게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아울러 급격한 도시화·산업화가 진행된 미국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심리학은 당시 미국 사회의 특별한 요구를 아주 적절하게 채워줬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심리학을 과감하게 선택한 게 오늘날의 미국 사회를 가능케 했다는 얘기다. 한때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란 뜻의 속어)’이었던 미국식 경영학이 오늘날 이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심리학주의로 과감하게 전환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식 경영학은 심리학적 지식의 실천적 변용이다. 그러나 전성기가 오래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모든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는 미국식 심리학 전성시대는 오늘날 ‘피로사회(Muedigkeitsgesellschaft)’라는 후기 근대적 모순으로 이어진다.
독일, 나치즘 트라우마로 심리학 외면
20세기 전반에 걸쳐 독일 학계가 신흥 학문인 심리학을 도외시하고 여전히 사회학·철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나치즘이다. 독일 지식인들에게 나치즘이라는 야만은 오늘날까지도 어쩌지 못하는 트라우마다. 독일은 괴테와 실러, 베토벤의 나라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운 나라에서 어떻게 홀로코스트와 같은 야만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에 관해 독일 지식인들은 여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치즘은 절대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이 히틀러와 같은 정신병자의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살인이라고 설명하면, 또 다른 병적 개인의 출현은 언제든 가능한 게 돼버리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치즘의 심리학 환원주의적 설명은 또 다른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 치욕스러운 과거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독일인 각자에게 도덕적·윤리적 책임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6년 독일에서 ‘골드하겐 논쟁’이 그토록 격렬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독일 지식인들은 나치즘을 주로 정치·경제와 연관된 사회구조적 문제, 혹은 사회문화적 문제로 설명했다. 산업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독일이라는 후발 자본주의국가에서 깔때기처럼 한 곳으로 모여 나타났다거나, 독일의 독특한 권위주의적 문화가 나치즘의 원인이었다는 식이다. 주로 테오도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이 이끌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독일식 권위주의적 가족문화가 위기의 시대를 맞자 히틀러라는 인물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후 독일 사회는 모든 종류의 권위주의를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일단 다양한 국가적 행사, 집단적 의식이 사라진다.
대학 총장과 교수들이 가운 입고 폼 잡는 대학 졸업식도 사라진다. 13년에 걸친 독일 유학 시절 나는 교수와 학생 전체가 모이는 행사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졸업식 가운도 없다. 이제까지 내가 행사에 입고 나간 박사 가운은 한국에서 어쩔 수 없어 맞춘 가짜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가 입고 있는 박사 가운은 죄다 가짜다.
심지어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모여 함께 노래하던 합창시간도 사라진다. 대신 리코더와 같은 아주 착한 악기의 합동연주가 합창을 대신한다. 68세대들은 부부와 자녀로 이뤄지는 가족조차 해체하려 했다. 권위주의적 사회의 기원은 권위주의적 가족제도라고 생각한 거다. 물론 남성 중심적 일부일처제도 해체하려고 달려들었다. 이런 종류의 다양한 사회구조적 변혁을 통해 독일인들은 각 개인에게 부과되는 홀로코스트의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수십 년이 지나 이런 시도가 이제 어느 정도 성공하는가 싶었던 즈음에 갑자기 다니엘 골드하겐의 박사 논문 ‘히틀러의 자발적 학살자들’이 나타났다. 홀로코스트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독일인들 개인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골드하겐 논문의 직접적 모티브는 1992년에 발간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브라우닝은 폴란드에 투입돼 수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101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에 대한 자료를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저지른 이들은 나치의 친위대도, 열혈 당원도 아닌 평범한 병사들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브라우닝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거나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한 사람들이 일으킨 집단범죄가 아니라는 거다. 누구나 똑같은 ‘상황’이라면 101 예비경찰대대의 대원들처럼 행동할 거라는 결론이다. 이런 브라우닝의 상황론적 결론에 골드하겐은 정면으로 반박한다.
홀로코스트는 절대 ‘상황’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거다. 평범한 독일 국민 개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결과라는 거다. 이런 골드하겐의 주장을 당시 독일 언론은 매우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도했다. 독일의 대표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유대계인 골드하겐을 ‘독일인의 사형집행자’로 부르기까지 했다. 독일 지식인들은 골드하겐의 개인주의적 결론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전후 수십 년간 노력해왔던 홀로코스트의 사회구조적 설명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의 트라우마는 이렇게 모든 종류의 심리학주의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났다.
미국 심리학의 긍정성 과잉이 부른 낭패
이뿐만 아니다. 독일 지식인들은 20세기 후반 세계 지성계가 몸살을 앓았던 포스트모던 논쟁에서도 한 발짝 비껴나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칸트적 선험성에 대한 포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포기할 경우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하버마스 같은 학자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근대의 프로젝트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완성되지도 않았기에 해체될 수도 없다는 거다. 오히려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양 축에서 도구적 합리성이 일방적으로 질주하면서 균형을 잃은 것이 근대사회의 근본 문제라는 주장이다.
근대적 개인의 문제가 심리학의 본고장인 독일에서는 여전히 사회구조적·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논의되는 동안 미국 심리학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사회문화적 구조와는 동떨어진 ‘진공 상태의 개인’을 전제로 하는 패러다임이다.
심리적 과정을 사회문화적 과정, 역사적 경험의 내면화로 설명하려는 독일식 설명과는 달리 미국식 심리학에서 전제하는 개인은 지극히 개별화된 주체다. 또한 이 개인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뤄낼 수 있는 전능한 주체’다. 근대 독일식 ‘규제사회’와는 구별되는 미국식 ‘성과사회’에 지극히 잘 어울리는 주체다. 미국식 개인주의 심리학에서 극대화되는 후기근대적 개인의 본질을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병철 교수는 ‘긍정성 과잉’으로 설명한다.
독일에서 오래 살아본 나는 잘 안다. 독일 지식인사회에서 그들 나름의 담론 규칙에 의거한 그럴듯한 ‘구라’를 만들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기껏해야 동양의 특수성을 전면에 내세운 ‘엑소티즘(exotism)’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 교수는 심리학과 사회학·철학을 편집한 아주 독특한 시선으로 후기근대적 개인을 설명하며 독일 지식인사회를 파고든다.
미국식 심리학주의의 본질을 이토록 정확하게 분석한 글은 처음이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저 입 언저리만 맴돌던 바로 그 얘기를 한 교수는 불과 몇십 쪽에 불과한 ‘피로사회’라는 짧은 책에서 칼날 같은 간결함으로 서술한다. 자신 있는 사람은 이야기가 짧다. 좌우간 이야기든 책이든 쓸데없이 길면 뭔가 의심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핵심을 한 교수는 ‘피로사회’라고 규정한다. 후기근대 성과사회는 개인을 끊임없는 자기착취의 나르시스적 장애로 몰아넣는다. 타인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착취다.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주체는 죽을 때까지 안정된 자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후기근대적 주체의 미완결적 성격은 자신을 태워버리는 ‘번아웃(burn-out)’과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프로이트적 억압은 타율적 규율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정성’이다. 수퍼에고의 본질은 사회적 규율의 내면화다. ‘~을 해서는 안 된다’ ‘~을 해야만 한다’는 타율적 규제와 억압, 강제로 인해 주체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반면 주체의 자율성이 극대화된 성과사회의 본질은 ‘긍정성’이다. 개인 능력의 무한긍정은 금지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고 위험하다는 게 한 교수의 주장이다. 끝 모르는 자기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점가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항상 줄지어 있는 자기계발서나 성공처세서의 핵심은 단순하다. ‘넌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속삭임이다. 여기에는 물론 또 다른 전제가 붙는다. ‘열심히 하면…’. 아니 도대체 얼마나, 어디까지 열심히 해야 하는 건가. ‘넌 뭐든지 할 수 있어’는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와 같은 뜻이다. 결국 한도 끝도 없는 이런 자기긍정성은 우리 모두를 피로하게 만들고 맥 빠지게 만든다. 근대적 개인의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후기근대적 우울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에디톨로지 시즌 1’이었다. 일본에 혼자 지내며 에디톨로지를 고민하다 보니 애초에 기획했던 것보다 범위가 자꾸 커졌다. 내친김에 좀 더 공부해서 보다 흥미로운 ‘에디톨로지 시즌 2’로 다시 돌아오겠다. 그동안 황당하고 좌충우돌하는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노는 만큼 성공한다』『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남자의 물건』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entebrus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