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은교’. 70대 노시인의 집 마당에서 잠든 고등학생 은교(김고은)를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돈의 맛’ 노출 수위가 기대보다 높진 않아요. 실망했어요.”
“‘은교’ 봤어요. 꽤 야해요. 여고생과 작가의 섹스 장면이 자극적이더군요. 여배우가 젊은 것 같은데 과감하다고 생각했어요.”
“박시연 가슴 노출 장난 아니던데요? ‘간기남’ 베드신 리얼했어요.”
최근 극장가에 걸린 영화 ‘은교’ ‘돈의 맛’ ‘간기남’ 등에 대해 한 주부 전용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반응이다. 세 영화의 공통점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소위 ‘19금(禁)’이라는 것. 세 편 다 100만 관객을 넘겼다. 6일 개봉하는 ‘후궁:제왕의 첩’까지 포함하면 올 상반기에 섹스 코드를 내세운 ‘벗는 영화’만 네 편이다. 이런 장르의 영화가 몇 달 새 줄줄이 개봉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방자전’의 스타 조여정이 주연한 ‘후궁: 제왕의 첩’.‘시인과 제자, 열일곱 소녀 서로를 탐하다’(은교), ‘욕정(慾情), 그 이상’(돈의 맛), ‘지독한 궁(宮), 광기의 정사’(후궁:제왕의 첩)…. 파격노출을 내세운 홍보문구도 저마다 자극적이다. 실제로 표현 수위도 과감해졌다. ‘은교’엔 여고생 은교를 연기한 배우 김고은의 체모 노출, 70대 시인 역의 박해일의 성기 노출이 있었다. 여고생과 수제자가 섹스하는 장면을 늙은 시인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창 밖에서 엿본다는 설정도 과감했다.
‘돈의 맛’엔 재벌집 남자(백윤식)와 필리핀 가사도우미의 전라 정사 장면을 비롯해 재벌집 사모님(윤여정)이 비서(김강우)에게 관계를 강요하는 설정이 포함됐다. 미국인 기업가와 콜걸들의 난교(亂交)파티도 나온다. ‘후궁’의 경우 왕과 후궁, 내시 등의 적나라한 정사 장면은 물론 궁형을 당한 내시(김민준)의 은밀한 부위도 그대로 드러낸다.
19금 영화에 눈길이 가는 건 단지 우리의 원초적 본능 때문일까. 이런 영화가 늘어나고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심리학적 배경을 들여다봤다.
‘색, 계’ 흥행이 출발 불황의 신호일까
우선 이런 영화가 왜 늘었을까다. 답은 장사가 잘 돼서다. 2000년대 들어 19금 영화 흥행은 ‘색, 계’(2007)에서 시작됐다. 곡예에 가까운 격렬한 성행위 장면, 주연배우 량차오웨이(梁朝偉·양조위)와 탕웨이(湯唯·탕유)가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행위를 했다는 논란 등에 힘입어 188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듬해엔 조선시대 화가 혜원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스승 단원 김홍도와 격정적 사랑을 벌인다는 설정의 ‘미인도’가 234만여 명, 파격적인 체위 묘사로 왕과 호위무사의 동성애를 그린 ‘쌍화점’이 377만여 명을 동원했다.
2010년 ‘방자전’은 춘향이 방자와 이몽룡 두 남자와 삼각관계를 맺는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관객 300만 명을 넘겼다. 주인집 남자가 가사도우미를 유혹해 파국에 빠뜨린다는 내용의 ‘하녀’도 같은 해 230만 관객을 거뜬히 모았다.
이러니 영화 관계자들은 “작품성이 웬만큼 받쳐준다는 전제하에 배우를 벗기면 100만 명은 기본”이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다운로드나 IPTV 시장 등에서의 수입도 짭짤하다. ‘방자전’은 지난해 다운로드 횟수 34만 건을 기록, 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극장 손님이 좀 덜 들더라도 추후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네 편이 한꺼번에 시장에 나온 건 이렇게 설명이 가능하다.
다음은 19금 영화를 찾는 사회의 소비심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다. 일단 불황기에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이른바 ‘불황의 속설’이다. 통계로 입증된 건 아니지만 흔히 불경기엔 스커트 길이가 변하고 하이힐 굽이 높아지며 매운 음식 매출이 늘어난다고들 한다. 사람들이 경기침체기엔 평소와는 다른 자극적인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라면업체들이 매운맛을 강조한 라면을 앞다퉈 내놓은 건 이런 심리를 노려서다. 반면 지난해 17%대까지 뛰어올랐던 하얀 국물 라면 점유율은 절반 이상 떨어졌다
불륜 소재 소설도 불경기에 잘 팔린다. 베스트셀러 30년의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에 따르면 불황엔 실제로 사회에 불륜현상이 증가하진 않지만 불륜 소재 소설은 잘 팔린다. 대공황기 미국에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버블 붕괴기인 ‘잃어버린 10년’ 당시 일본에선 실락원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국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와 전경린의 내 생애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경제적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허전한 구석을 자극적 소재가 파고들었다는 분석이다.
노출 심한 영화도 일종의 불황기 소비재로 볼 수 있다. 청년실업과 저출산, 노후 불안, 이념 대립, 빈부격차 심화 등으로 현실에 대한 울분과 피로감이 커진 상황에서 구성원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탈출구(exit)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기대치가 낮아진 사회의 특징이다. 군부독재로 암울했던 1980년대에 사회적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에로영화가 전성기를 맞았던 현상과 비슷하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대구사이버대(상담심리학) 교수는 “미국 호황이 최고조에 달했던 50년대엔 보수주의 색채가 매우 강했다. 반대로 60년대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 등을 거치면서 젊은이들이 사회에 크게 실망하고 난 후엔 B급 영화나 에로물이 번성했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사회에 대한 실망감이 클 경우 성(性)과 관련된 상품을 소비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놓고 격렬한 논란을 빚었던 영화 ‘감각의 제국’(1976)이 한 예다. 연인을 죽이고 성기를 자르는 극단적 성 묘사의 배경엔 일본 전공투(全共鬪) 세대의 깊은 좌절감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여자는 낮에 같이, 남자는 밤에 혼자 관람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건국대 교수도 탈출구론에 동의한다. 벗는 영화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욕구불만을 분출하는 수단이 필요해서라는 얘기다. 그의 분석은 이렇다. “프로이트는 성욕과 공격성, 즉 에로스(Eros·삶의 본능)와 타나토스(Thanatos·죽음 본능)가 같이 움직인다고 봤다. 불만이 쌓인 끝에 공격성이 극단적으로 발현되면 ‘묻지마 살인’ 같은 일이 벌어진다. 19금 영화 소비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방법 중 하나다.”
파격노출을 앞세우면 일단 눈길을 끌기는 수월하다. 소위 섹슈얼 마케팅의 효과다. 그런데 무조건 벗긴다고 잘 팔리는 건 아니다. 야동, 즉 포르노 소비와 다른 점이다.
영화평론가 김형석씨는 “에로영화 전성시대였던 80년대엔 예쁘고 글래머인 여배우가 얼마나 벗느냐에 관심이 집중됐다. 막무가내로 벗기다 보니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개연성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요새는 벗는 코드가 얼마나 주제와 잘 결합됐느냐가 흥행의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은교’가 원조교제 풍의 설정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젊음을 향한 인간의 서글픈 욕망이다. ‘돈의 맛’은 섹스를 통해 돈과 욕망의 노예가 된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끈적끈적한 베드신은 이런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다.
흥미로운 건 극장 관객에서 여성 비율이 높고, 다운로드나 IPTV에서는 남성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여자들은 오전 혹은 대낮에 끼리끼리, 남자들은 밤에 혼자 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색, 계’의 경우 극장을 찾은 남녀 관객 비율이 2대 8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노출 장면이 많은 영화는 서울 시내 아파트단지 주변 극장에서 오전 시간대에 40대 아줌마 관객이 많이 본다.
여성 관객은 19금 영화를 고를 때 심리적인 방패막이를 필요로 하는 특징을 보인다. 영화예매사이트 맥스무비 김형호 실장은 “‘은교’는 박범신 베스트셀러 원작, ‘돈의 맛’은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이라는 후광이 야한 영화를 보러 간다는 부담감을 덜어줬다”고 말했다. 심영섭 교수도 “여성들은 대낮에 야한 영화를 보러 간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지적인 포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원작의 문학성이 높다든가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타 예술성을 인정받았다든가 하는 고급 담론이 포개지는 게 필수다. ‘선데이서울’은 안 되지만 ‘채털리부인의 사랑’은 된다는 심리가 은연중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