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치료, 놀이치료, 독서놀이
독서치료는 독서의 힘을 통하여 사람의 심리, 정서, 부정응 문제 해결을 돕고자하는 임상학문이다.
독서치료와 함께 놀이치료, 미술치료는 최근 더욱 각광을 받으며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종의 응용 심리치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치료방식의 공통점은 매개물이 있다는 점이다.
독서치료는 책, 미술치료는 그림, 놀이치료는 놀이(또는 장난감)를 이용해 심리치료를 한다. 그리고 ‘놀이’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치료를 수행하는 치료사와는 달리 치료를 받는 내담자의 입장에서는 노는 것이다. 책 읽으며 놀고, 그림 그리며 노는 모습을 관찰해 치료에 적용한다.
무엇보다 이들의 명백한 공통점은 ‘치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치료는 치료의 대상, 즉 환자를 상정한 개념이다.
독서치료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심리치료의 무거운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 놀이의 성격을 가미하려고 하지만, 치료라는 본질적인 성격은 달라질 수 없다.
독서치료와 독서놀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심리치료와 심리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의해 학문으로 정식화된 태생적 배경 때문에 심리치료의 성격이 강했다. 20세기 심리학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 심리학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며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주요한 특징은 치료에서 자유로워지고, 인간의 발견이나 자아실현 같은 비전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 교육이나 비즈니스, IT 분야 등 사회의 주요 분야는 심리학이 지적 토대가 되고 있다.
심리학자 중에서도 21세기 심리학자라고 평가받는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는 이런 흐름을 가장 먼저 포착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활동하던 당시 주류를 형성하던 심리학이 병리적 관점을 남용하는 모습을 비판하였다.
나는 고전적 프로이트학파를 비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 건강한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갈색 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이다.
- 매슬로
20세기 중엽 미국 심리학계의 흐름은 크게 프로이트와 융으로 대표되던 정신분석과 파블로프와 왓슨으로 대표되던 행동주의로 나뉘어 있었는데, 정신분석과 행동주의는 인간의 특정 측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곧 정신분석에서 인간은 성적 충동과 무의식에 사로잡힌 비합리적인 동물로 묘사되었으며 행동주의에서 인간은 환경 자극에 반응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동물심리학과 행동주의는 인간이 결핍욕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 역시 인간의 충동을 위험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심리학의 맹점은 아픈 사람들의 경험이나 자신들의 욕구 불만 등 심리적으로 좋지 못한 경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초 위에서 인간을 바라본다고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아찔한 일이다.
인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갈색 안경도 아니고 투명 안경도 아니고 선명한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도시 창조성 분야의 권위자이자 캐나다 토론토대학 경영대학원 교수인 리처드 플로리다는 대한민국에 ‘창의적 인재’에 속하는 사람이 400만명(전체 근로자의 20%) 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최고 수준인 아일랜드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적 석학이자 미래학자인 자크 아탈리 또한 “한국은 상당히 오랫동안 자력으로 창조적 계급을 키우거나 외부로부터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야말로 창의적 인재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의 교육, 심리학과 연관된 중요한 문제다.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자아나 인격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쓸 만한 일꾼을 관리하는 시스템에 가깝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파블로프 심리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독서치료 역시 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독서치료가 ‘치료’에 치우칠 경우 독서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순기능을 해칠 수도 있기에 위험성은 크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마음의 양식인 소중한 책이 가치 있게 쓰이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서놀이가 탄생했다.
독서놀이의 맛
인생을 먼저 살다 간 선조들이나 그보다는 좀 젊은 축인 선배들의 삶의 흔적을 보면 놀다 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천상병 시인이 말년에 쓴 시 귀천(歸天)만 봐도 그렇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전문
동양의 대스승인 공자 역시 말년에 제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가슴에 품은 뜻을 이야기하면서 ‘노는’ 이야기를 한다.
증석이 말했다. “봄이 되면 겨울옷을 간편한 봄옷으로 갈아입고, 농번기가 지나면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대에서 바람을 쐬고 흥얼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께서 감탄하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도 점과 함께 하고 싶구나!”
- 논어11-25
어찌 천상병 시인과 공자만 노는 것을 이야기했을까? 한 세상 재미있게 놀다가 가는 것은 우리네 삶의 소박한 꿈이었다.
우리 민족은 놀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공부나 스펙쌓기, 돈 벌어오기 같은 삭막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에 있는 ‘놀이 유전자’는 언제든 놀 준비가 돼 있다고 믿는다.
독서놀이는 책을 가지고 논다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고, 참여하는 사람은 일생의 벗인 가족이다. 독서놀이를 통해서 마음의 병을 치유하거나 불안이나 스트레스 등을 제거하는 치료의 성격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부분에 불과하다.
치료의 성격이라면 책보다는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서 한동안 수다를 떠는 게 더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