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민 칼럼] 아이스 버킷 챌린지의 심리학

[기독일보] 목욕탕 밖에서 물을 뒤집어쓴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름은 얼음물 뒤집어쓰기가 전 지구적인 유행으로 번지고 있다. 루게릭 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모금을 촉진하기 위해 시작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에서는 이 운동이 원래의 의미를 벗어나 점점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남들의 시선을 더 받기 위해서 무리한 시도를 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이 왜 물을 뒤집어쓰는지 이유조차 모른 채 소원성취를 비는 'SNS 주술'로 확산되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에는 루게릭병과 관련이 없는 정치, 사회적인 의미를 담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다른 방법도 많은데 하필이면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행위'에 열광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행위에 담긴 인간의 심리는 무엇일까?

먼저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하나의 유행이다. 유행을 남들이 하니까 그저 따라 하는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유행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을 작위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유행은 공감이 있어야 확산된다. 다양한 인종, 지역, 문화, 생활 환경의 차이 속에서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공감은 새로운 연대의식을 낳고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보여지는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2014년 이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전 지구적인 연대의식은 무의식 속에 숨겨왔던 '고통에 대한 공감'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루게릭병을 통하여 타인의 고통에 마음이 울린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행위에 대한 공감이다. 먹고 씻는 일 외에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발견한 물의 또 하나의 역할은 '민낯 드러내기, 경계 허물기'이다. 아무리 화장을 잘하고, 옷을 잘 입어도 한 바가지 물 앞에서 우스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유명인들이 얼음물을 뒤집어쓰고 난 뒤의 모습은 평범한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다양한 외적 요인에 감추었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를 살 것 같은 사람들의 경계는 한바탕 웃음 앞에 허물어진다.

얼음물이 담겨있는 물통은 육체의 고통, 미래에 대한 불안감, 타인에 대한 부채의식 등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고통의 총합이다. 관념 속의 고통은 실제보다 더 위협적이다. 그리고 그 공포가 머리 위에 자리 잡은 한 불안은 지속된다. 지금까지 그 불안은 외부로부터 강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스버킷 챌린지에서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행위는 능동적이다. 얼음물을 붓는 것을 옆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허락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열등감과 수동적 인생에서의 주도권 회복에 대한 도전적인 용기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모습은 '별것 아닌 것에 대한 확인'이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차가움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기는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얼어 죽지 않는다. 인생의 고통도 막상 맞부딪쳐 보면 어쨌든 견딜만하고, 어쨌든 살 길은 있는 것이다. 고통스럽게 불안한 인생이 헛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는 만만한 인생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올려놓는 행위는 '고통의 공유와 공감의 확산'이다. 혼자만 당하는 일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얼음물 한 바가지는 '나'라는 개인의 존재를 '우리'라는 열린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경험하고, 내가 먼저 망가지고, 내가 먼저 웃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루게릭 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공감의 시작점이지 끝이 아니다. 한때 반짝하고 사라진다고 폄훼할 필요도 없다. 금방 지나가지만 돌고 도는 것이 유행인 것처럼, 이 공감은 또 다른 시간에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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