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에 가족붕괴 가속…더 과격한 범죄 나타날수도

절망살인의 시대
실업 등 몰린 빈곤·소외층 처음엔 자기탓하다 주변·사회로
사전계획·자살예비 등 국외 다중살인과 유사한 현상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기던 비극들이 국내에서 발생하고 있다. ‘여의도 칼부림 사건’, ‘의정부역 흉기 난동’ 등 공공장소에서 다수를 상대로 극단적 분노를 표출하는 범죄들은 한국판 ‘다중살인’(Mass Murder)에 가깝다. 사망자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각 사건의 피의자들은 ‘주변 시민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마구잡이 범행을 저질렀다.

이웅혁 경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이번 사건은 ‘다중살인’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공정하게 대접받지 못했다고 여긴 사람이 범행 대상을 미리 정하고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해친 범죄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다중살인을 ‘묻지마 범죄’와 구분했다. 구체적 표적이 있고, 사전에 범행을 계획하며, 범행 뒤 자살까지 계획한다는 점에서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묻지마 범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2002년 미국 국토안보부 소속 비밀수사국이 26년간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 △범죄자 전원이 남성이었고 △98%는 범행 직전 중대한 실패나 상실을 경험했으며 △93%는 사전에 범행을 계획했고 △오랫동안 좌절과 분노를 내면에 축적하면서 △자살을 시도하거나 고려하다가 증오를 범죄로 표출한 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중살인은 그저 흉악한 범죄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실패와 그로 인한 분노가 누적돼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웅혁 교수는 이번 사건이 띠는 다중살인의 요소 가운데 하나로 “피의자 김아무개(30)씨가 불공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응징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을 꼽았다. 자신을 부당하게 대했다며 전 직장 동료들을 처벌하려 했고,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공장소인 여의도를 일부러 범행 장소로 골랐으며, 처벌이 일차적 목표이므로 체포·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목표 달성 뒤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다.

최승원 덕성여대 교수(심리학)는 이번 사건에 대해 “불합리한 상황을 해소할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 범죄”라고 설명했다. 다중을 표적으로 삼는 ‘절망살인’의 범인들은 처음엔 자신을 탓하다가 점차 비난의 대상을 주변 동료·친구로 바꾸고, 나중에는 자신을 절망의 상태로 밀어넣은 것이 이 사회 전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특히 김씨를 비롯한 최근 사건의 피의자들이 사회경제적 곤궁에 처한 빈곤·소외층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처지에 놓인 이들이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비관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절망살인’으로 부를 만하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양극화가 급격히 진행된 가운데 부유층과 권력층의 부정부패가 빈곤층의 불만과 증오를 돋웠다”며 “그동안 자살을 통해 사회적 공격성을 내면으로 돌렸던 빈곤층이 이제 외부를 향해 그 증오와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이런 절망살인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회적 양극화가 여전히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임상심리학자 조용범 박사는 “실업이나 경제적 문제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위한 구체적인 복지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내 잘못만이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며 “지금의 한국은 폭력적인 분노 수준이 상당히 높은 사회”라고 지적했다. 최승원 교수는 “한국에선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가족 붕괴 등이 매우 급속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이에 따른 범죄 등 악영향이 서구보다 더 과격한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현철 엄지원 진명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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